예배 이야기

'나사로 사역'

사막여행자 2020. 5. 23. 16:34

저는 독립교단, 정확히는 KAICAM (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연합회)에서 안수를 받은 사역자입니다. 요즘 교계의 흐름을 볼 때에도 '부교역자'(부목사/전도사 등)가 되어 섬기기엔 어려운 나이가 되었습니다. 자연스레 <개척> 혹은 <협력 목회>와 같은 방향성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 보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서 오늘도 블로그에 글을 씁니다. 

 

'나사로 사역' 

이렇게 네이밍(naming)을 했습니다. 

 

교회의 사역현장을 돌아보면서 떠올린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자꾸만 안으로 움츠려 드는 모습입니다. 물론 많은 교회들이 다양하게 이웃을 섬기고 있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아직은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공동체라기보다는 '모이는 교회'로서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웃을 향해 나가야 하는데, 사람들을 교회로 초대하여 무언가를 하는 형태가 아직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종종 사역자들이 성도들을 '손안에' '내 시선이 닿는 곳' 그런 바운더리 안에 두려고 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제가 개척을 하거나 독립된 공간을 통해 어떤 활동을 하면 기존의 교회들과 전혀 다를게 더 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대답은 '아니다'입니다. 저도 제 틀을 벗어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함께 하는 사람들 역시 그 틀 이상으로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전통을 잘 유지하면서도 각자의 색을 잃지 않는 교회가 되면 좋겠다는 '이상 속 비전'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노력할 것입니다. 그게 <나사로 사역>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사역의 형태 가운데 마음에 꽂히는 장면 하나가 있습니다. 죽음에 이른 영혼을 살려내신 것도 인상 깊고 꽤나 믿기지 않는 기적적인 부분입니다. 하지만 이 장면보다 더 인상 깊은 것은 "나사로를 풀어주어 다니게 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을 죽음에서 생명을 얻게 합니다. 그렇게 살아난 사람은 무덤에서 벗어났지만 나사로에게는 아직 자신을 감싸고 있는 천이 둘러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풀어주어 다니게 하는 것은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 몫입니다. 사역자는 성도들을 이렇게 자유롭게 다니도록 '풀어주는 사역'을 해야 합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사로 사역>입니다. 기회가 주어지면 꼭 이 일을 성실하게 해내고 싶습니다. 

 

아침에 페이스북 <문화전도연구소>에서 인상적인 글을 봤습니다. "지금까지 전도의 본질보다 현상에 목숨을 걸었다. 전도는 내 교회가 아니고 복음 그 자체를 전해야 한다' 깊이 공감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들을 사람에 몰두하셨습니다. 그것이 사명이었으니까요. 예수님은 자기에게 사람들이 모여들 때마다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들을 모으고 인원이 넘치면 '교회당'을 건축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고치고 회복시키신 다음 반드시 '집' 또는 그가 속한 '사회' 속으로 되돌려 보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역자들이나 교회에서는 사람들을 '섬김'이란 미명 아래  교회에서 봉사하도록 합니다. 오해는 마세요. 교회에도 사역을 돕고 사람들을 돕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걸 비판하는 게 아닙니다. '주의 일'이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오히려 묶어놓는 사람들도 있어서 안타깝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지요. 그러나 왜 사람들이 봉사하면서 오히려 상처 받고 힘들어하는지를 한 번쯤은 생각해 보세요.)

 

사역자들에게 제안합니다. 사람들이 자유를 얻어 일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풀어주는 사역을 해보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샘영과 자유를 얻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야 한다면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그것을 증명할 수 있도록 돌려보내야 합니다. (얼마 전 언급했던 것처럼) 각 가정과 마을과 연계하여 함께 서로를 살리는 그런 사역 형태를 연구하고 개발하면서 공생하는 사역을 해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