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이야기

[발췌] 찬양사역 관련 글(최용덕 간사)

사막여행자 2020. 9. 2. 20:55

[참고] 이 글은 최근의 글이 아니라,  최용덕 간사님께서 오래 전에 올리신 글의 내용입니다. (코로나 사태 훨씬 이전의 기록)

어제는 인천 만수동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간증사역을 수행하고 왔습니다.상가건물 3층에 있는 자그마한 개척교회였습니다. 주일오후예배에 모인 교인 숫자가 20여 분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시작된 지 사실은 15년이나 되었답니다. 그나마 한 동안은 지하에 예배실이 있었는데 지상으로 올라온 것만 해도 너무나 감사하다고 목사님께서 그러셨습니다.

 

시작된 지 15년이나 된 교회. 4-5년쯤이면 몰라도 그 정도면 <개척교회>라고 부르기엔 좀 그렇습니다. 그냥 <작은 교회>라고 하는 게 맞을 듯 합니다. 개척한 지 15년이나 되었지만 성도 숫자가 많지 않은 이 작은 교회를 담임하시는 목사님도 키도 크지 않으시고 너무도 순박하게 생기셨습니다.

 

자그마한 예배당 바닥과 기껏 반 뼘 정도 높인 강단에 올라서서 제가 내뱉은 첫 마디가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꼭 닮은 이 교회가 진심으로 너무 좋습니다." 내 진심이었습니다. 번듯한 예배당 건물도 없는, 임대 상가 교회, 그 오랜 세월을 수고하고 헌신했지만 교인 수 20명 밖에(?) 안 되어서 그저 낮아지고 낮아지고 너무 낮아져서 예수님을 닮은 담임목사님, 예수님을 꼭 닮은 작은 예배당, 예수님을 닮은 설교단,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을 꼭 닮은 가난한 성도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하겠다" 유언으로 남기셨던 예수께서 바로 그 자리에 함께 계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어쩌다 보니 요즘 이렇게 작은 교회에서의 집회 요청이 많습니다. 최근 두 달 동안에만 세 교회가 자그마한 교회였습니다. 한 교회는 개척한 지 5년 됐는데, 교인 숫자가 10명인 교회였고, 한 교회는 개척한 지 10년 됐는데 4-50명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상반기에도 이렇게 작은 교회들을 방문한 횟수가 적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이런 교회들은 교역자 생활비를 줄 수 없을 만큼 재정적으로 열악하기 짝이 없는 미자립교회입니다. 그러니, 이런 교회에 가서 사역으로 섬기고 돌아올 때 교회 측에서 건네주는 사례 봉투를 차마 받아들 수가 없습니다. 처음 강단에 올라가서 회중석을 내려다볼 때 곧바로 작정을 합니다. '주님, 오늘 사역은 무사례 사역입니다.'

 

분명 돈벌이를 위해 사역을 나가는 것은 아니며 만약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건 <사역>이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당연한 무슨 관례처럼, 교회를 방문해서 설교나 간증이나 노래로 사역을 감당하는 사역자들에게 교회는 봉투를 준비해서 건네기 마련입니다.

 

사역을 마치고서 교회를 떠나오면서 이별의 인사를 할 때 담임목사님이나 장로님께서 봉투를 건네주실 때마다 저는 예외없이 항상 너무도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밥벌이로 이 일을 수행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어떤 교회는 예배 막바지에 일부러 저를 앞으로 불러내어 온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봉투를 건네주는데 그럴 때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여간 난감한 게 아닙니다."수고비나 보수가 아니라 사역후원금입니다." 사역후원금? 말은 그럴듯하지만, 그 말이 그 말이란 거 다 압니다. 그나마 요즘은 좀 맘이 편해져서 봉투 주시면 그냥 감사히 받아넣습니다. "사역을 위해 귀하게 잘 쓰겠습니다."

 

그러나, 교인 수 10명, 20명... 3, 40명 모인 교회에 가면 그분들이 정성껏 모아서 담아 주시는 봉투를 차마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그 모임을 위해 헌금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그렇다고 내가 모아둔 돈으로 헌금할 여력은 없고, 가장 좋은 방법이 저에게 주어진 봉투를 일단 감사히 받고 그 자리에서 혹은 나중에 도로 그 교회에 헌금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저를 보고 사람들 중에 혹 이러는 분들 계십니다. "이야, 최간사, 정말 귀한 사역자다. 정말 욕심없이 주님 사역 감당하는 사역자다."

 

제가 장담컨대, 한 마디로 웃기는 말씀입니다. 저는 절대로 그렇게 거룩하고 숭고하지 못합니다. 내 피 같은 돈 들여가며 작고 어렵고 가난한 교회들 찾아다니며 주님께서 부탁하신 사역을 묵묵히 감당하는 그런 고상한 사역자 절대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선뜻 받은 봉투를 도로 헌금할 수 있는 것은 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역 감당하라고 세 교회가 저에게 후원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서울 광염교회(담임, 조현삼 목사님) 공동체에서, 제가 몸담아 온 교회공동체 대전 새로남교회(담임, 오정호 목사님)에서, 우리 갈말가족이신 닛시 장로님께서 섬기시는 마산 가음정교회에서 매월 적지 않은 얼마씩을 제 개인 계좌 혹은 아내의 계좌로 넣어주십니다. 그러면 저는 그 후원금으로 사례 없이 집회 사역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세 교회 공동체에서 지원하시는 후원금으로 생색은 제가 내는 것입니다. 영광은 제가 얻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혀 박수 받을 일 아닙니다. 

 

사실 저 같이 교회들에서 후원하는 문화(?) 사역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은, 자신이 초청받아가서 사역하는 교회 공동체에서 집회 후에 주는 얼마의 사례금으로 생계를 유지하거나 사역합니다. 그런 분들은, 저처럼 집회 후에 받은 봉투를 폼나게 도로 건네주며 "헌금입니다" 하고 소리칠 수가 없는 분들입니다. 또 다른 생업을 가지지 않는 한, 혹은 배우자가 괜찮은 직업을 가지고 있거나 장성한 자녀들이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는 한 자기 돈 들여, 사례 없이 작은 교회공동체 찾아가서 사역을 수행할 수 있는 사역자는 정말 드뭅니다.사실 그런 분들이야 말로 진짜로 귀한 분들입니다.

 

감사하게도 저는 이렇게 폼나는 고상한 사역 하라고 세 교회공동체에서 후원도 해 주시고, 해와달 문서사역 후원자들로부터 매월 100만원 정도라도 지원 받아 식구들 밥은 먹고 옷은 입고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편도 1시간씩 걸리는 출퇴근 길 수고를 마다 않고 늦은 밤이 되어야 퇴근할 수 있는 직업인 아내의 헌신을 통해 아이 교육과 주거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으니 저는 정말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역자입니다. 정말 감사하고 감사해야 하는 사역자입니다.

 

다른 음악사역자들을 보면 너무 딱합니다. 예전 미혼 때나 자녀들이 어렸을 때는 "어디든지 불러만 주시면 달려가서 아무리 사례가 적어도 기쁨으로 사역하겠노라"던 분들이 자녀들이 커 가고 늘어나는 교육비와 주거비 부담이 커지면서 그렇게 해서는 생활이 안 되고 생계도 힘들어지자 이제 정당한(!) 초청 사례비를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반주자 같은 동행이라도 있으면 더 많은 금액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제시된 사례비를 부담할 수 없는 교회로부터 받은 집회요청은 거절합니다. 

 

그런데 초청 사례비 액수가 올라가면서 또 다른 악순환 고리가 시작되었습니다. 1-2백만원, 많게는 1천만원씩 주어야 사역자를 초청할 수 있는 교회공동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작은 규모의 교회공동체들은 외부에서 음악사역자들을 초청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러다보니 엉뚱하게도 이제 음악사역자들이 초청받아 가서 사역할 사역지가 점점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저 같이 고상한 척 하고 거룩한 척 하는 바리새인 교사들은 "스스로 사례비를 요구하는 사역자는 사역자(使役者)가 아니라 기독교 직업인이다" 라고 떠들어 대는 데다 교인들 중에도 그런 음악사역자들에 대해 <돈 밝히는 직업 가수들>이라고 못마땅해 하는 이들이 아직도 많은 터라 점점 음악사역자들이 설 수 있는 무대(?)는 줄어들고 있습니다. 사역을 통한 수입이 적기에 어쩔 수 없이 생업에 매달려야 하는 대부분의 사역자들은 이제 하늘로부터 주어진 사역의 사명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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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노래하는 음악사역자는 아니지만, 어쨌든 일종(?)의 음악사역자로서 어제 오늘의 이런 현실을 보며 너무 속상하고 안타깝습니다. 마치 일반 연예인들처럼 기획사에 속해서 매니저가 집회를 잡고, 스케줄 관리하고, 상당한 액수의 사례비도 당당하게 요구하는 직업적 크리스천 예술인으로 변신한, <예전의 음악사역자>들의 현실도 속상하고 안타깝고, 음악사역자들을 초청하고 싶지만 재정적 부담이 너무 커서 감히 꿈도 못 꾸는 대부분의 작은 교회들의 현실도 너무 속상하고 안타깝습니다.

 

만약 제가 서울 광염교회를 비롯한 교회공동체들로부터의 후원이 없었더라면 제가 개척한 지 1년 된 영주 어느 작은 교회를 찾아갈 수 있었겠습니까? 교인 열 명, 스무 명 모인 작은 교회들을 무사례로 기쁨으로 섬길 수 있었겠습니까?

 

어림없는 일입니다. 워낙 고상하고 거룩한 척 잘하는 저인지라 겉으로는 "아, 그럼요! 얼마든지! 저는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으로 채워주실 줄 믿으니까요! 설령 안 채워주셔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오라는 데는 무조건 가서 하나님 내게 부탁하신 사명 묵묵히 당해야 하는 게 사역자의 길 아닐까요?" 큰소리치겠지만, 한 마디로 웃기는 소립니다. 그래서 저는 경건하고 고상한 사역자로 알려졌지만 제가 가족 생활비도 제대로 못 갖다 준 덕분(?)에 아내가 대신 치러야 했던 개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화장품 외판, 피부 맛사지사, 부동산중개소 직원...지금도 그런 고생 하고 있으니, 함께 사는 장모님은 고생하는 딸을 볼 때마다 화가 나서 저를 못마땅해 하십니다. 그런 제가 만약 세 교회의 후원 없이, 내게 주어진 수입만으로 작은 교회들 다니며 사례도 안 받고 집회사역을 섬긴다면 내 가족들이 그만큼의 희생을 또 대가로 치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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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저는 바로 저 <최용덕 간사>가 하나의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제가 그런 사역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앙관과 인격이 검증되어진 사역자를, 좀 큰 규모의 교회공동체가(한 교회가 힘들면 다수 교회가) 그 부양가족 생계를 일정부분 책임지고, 규모가 크든 작든, 전국 어디든, 그 사역자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달려가서 <아무 대가 없이> 사역하도록 한다면, 가장 좋은 대안이라 생각합니다. 큰 교회라면 교회 안에 그런 사역자 팀을 꾸리는 것도 좋은 길일 것입니다.

 

그게 어려우면, 현재의 저처럼, 초청 사례를 감당하기 어려운 작은 교회공동체들에 한해 초청 사례를 대신 후원해 주는 방법도 좋은 방안이라 여겨집니다. (저는 이런 후원 교회나 후원자들을 찾아볼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냥 제가 교회로부터 받은 사례 봉투를 도로 돌려드리면 그분들이 몹시 난처해 하시는데 "이 집회를 위해 후원하는 교회나 후원자님들의 후원금으로 이 집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하면 그분들도 덜 미안해 하십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사역자 당사자들에 대한 간청입니다만, 바울 사도처럼, 사역자들이 철저히 <자비량> 사역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일주일 중 5일은 최선을 다해 생업에 종사하여 가족 생활비와 사역비를 벌고, 주말이나 주일에는 어느 곳이든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에 달려가서 <아무 대가 없이> 사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히 음악사역자들을 초청하려고 꿈도 못 꾸는 작은 농어촌교회나 규모가 작은 미자립 교회, 개척교회들도 기쁨으로 이런 사역자들을 부를 것입니다. 정히 그냥 무사례로 초청하기 미안하면, 따뜻한 식사 한 끼와 오가는 교통비만 부담하라고만 하면 그 정도는 얼마든지 기꺼이 부담할 수 있는 작은 교회도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제가 요즘 작은 교회들에 불려가는 회수가 점점 늘어나는 가장 큰 이유는 초청 사례가 적어도 기꺼이 간다는 소문(!)이 나서입니다. 목사님들끼리 정보를 주고 받는 것입니다. 일전에 제가 갔던 천안 목천읍 어느 교회 담임목사님께서는 제 면전에서 딱 깨놓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친한 목사님이 자기네 교회에서 사례로 20만원을 최간사님께 드렸다기에 제가 그랬지요. 진짜냐고? 그래도 되냐고? 제가 그 목사님께그랬지요. 우리 교회는 그보다는 더 드릴 수 있다고! 그래서 바로 간사님께 연락을 드린 겁니다."

 

많은 교회들이 음악사역자 초청하려면 많은 돈 들여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감히 꿈도 못 꾸는데, 그런 부담이 없거나 작기만 해도 음악사역자들이 자신의 탈란트로 봉사할 수 있는 교회들이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생업이냐, 사역이냐?> 식의 이분법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바울 사도와 같은 사역 방식(자비량)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와 사명을 땅에 묻어두지 않고 최선을 다해 이웃을 섬기는 자비량 사역자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부양가족이 없는 <독신>이었기에 자비량 사역이 훨씬 용이했을 것입니다. 바울 스스로는 교회 공동체에 신세를 안 지려고 정말 발버둥을 치는 사역자였지만 그래도 가는 곳마다 교회공동체에서 바울을 최선을 다해 도왔습니다. 그러니 부양가족이 있는 현대 기혼 사역자들의 경우는 어떤 방식으로든 교회공동체가 함께 짐을 져야만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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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간절한 바람은, 작은 규모의 교회 공동체들이 사례를 주지 못하여도 미안한 마음 가지지 않고 음악사역자들을 초청하여 아름다운 찬양과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기 위해 어떤 길들이 있을까 궁리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당장은 저 혼자서라도 후원 교회들의 재정후원에 의지해서 힘 닿는 대로 작고 소박한 교회들을 찾아가 섬기겠지만 더 많은 음악사역자들이 사례에 연연하지 않고,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헌신과 희생을 강요당하지 않고 낮고 작은 곳을 기쁨으로 찾아가 섬길 수 있는 길이 생겨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