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이야기

[발췌] 예배인도자의 중요성(최용덕 간사)

사막여행자 2020. 9. 2. 19:32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소명에 따라 외부 초청 집회를 섬겨야 하기에  본의 아니게 본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들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순서를 맡은 집회들은 아무래도 제게 주어진 시간이 대부분이므로  교회들 간의 차별을 알아차리기 힘들지만  제가 오로지 회중의 일원으로 회중석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 경우는 교회들마다 느껴지는 느낌이 정말 서로 다릅니다.

 

최근 두 달 동안 각기 다른 두 교회에 두 주일씩 주일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교단에 속한 교회들이니 예배 순서도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나 두 교회의 예배 분위기와 회중들의 예배 중 그리고 예배 후의 반응은 천양지차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 회중들의 예배 태도, 예배 자세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듣습니다. 무언가를 얻으려고 주일예배에 가서는 안 된다든지, 예배를 평가하고 분석하려고 앉아 있으면 안 된다든지, 결국 예배를 통해 성령충만함읃 얻거나 소위 은혜(감동)를 받는 것은 전적으로 예배자 본인의 태도와 자세에 달려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정말 예배를 사모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예배에 임하면 아무리 어설픈 내용의 예배 순서들을 통해서도 큰 감동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것은 절반은 맞는 이야기이지만,  절반은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참석했던 한 교회 주일예배에서  예배 중의 대표기도를 맡으신 한 권사께서 정말 애절한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저희가 이 예배를 통해 성령충만함을 얻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비록 세련되지 못한 기도였지만 그 진심이 느껴지는 기도였습니다. 온 성도들이 "아멘!" 하고 화답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의 주일 예배는 시종일관 냉랭했고, 성도들이 부르는 찬송가는 너무도 무기력하였으며 설교시간에 회중의 절반은 졸았고, 예배가 마친 후에 회중들의 반응도 또 한 번의 주일 의무를 수행했다는 안도감 정도뿐이었습니다. 권사께서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던 성령 충만함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반면에 지난 주일에 참석했던 다른 교회의 주일 예배에선 성도들이 확신에 찬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찬송가를 우렁차게 불렀고 설교시간엔 심중 저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작은 "아멘!" 소리들이 곳곳에서 들렸으며 예배가 마쳤는데도 여러 성도들이 차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엎드려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예배당을 빠져나가는 신자들의 얼굴엔 평화와 기쁨이 넘쳤습니다. 이 교회에서 가끔 주일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항상 이 교회에선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다시 말해, 제 자신도 이 교회에선 예배를 드릴 땐 가슴이 벅차고 감격이 됩니다. 예배당을 나올 땐 설교자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여전히 귓가에 맴돌고  그 메시지가 한 주간 내내 제 가슴속에서 메아리칩니다.

 

두 교회의 차이는 <예배 인도자>의 차이입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선 주일 오전 예배의 경우 인도자가 곧 설교자이므로 <설교자의 차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설교의 차이만은 아닙니다. 예배 전체를 통해 성도들로 하여금 무엇을 수행하도록 이끄는가, 영적으로 어떤 자리로 인도하는가, 예배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해 어떤 자세와 태도로 예배를 드리게 하는가, 주일 예배를 통해 신자들이 무엇을 얻고 세상으로 돌아가도록 만드는가 하는 것은 예배 인도자의 중차대한 사명이요 역할입니다.  거듭 말해서, 신자들이 예배를 드리러 나올 때의 자세와 태도가 정말 중요한 요소이지만  신자들로 하여금 예배를 드릴 때의 자세와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일깨우고 권면하는 사명도 예배 인도자(설교자)에게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의 주일예배에선 하나님을 향한 예배(Worship, 경배)가 없습니다. 그런 순서는 있는데 성도들이 그런 마음으로 그 순서를 수행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보에 정해진 순서와 오랫동안 반복해온 습관에 따라 행동할 뿐입니다. 엄위하신 하나님, 전능자 하나님에 대한 경배가 없습니다. 예배 순서에 따라 일어서는데 왜 일어서는지를 다들 모릅니다. 성가대가 하나님 앞에 찬송의 노래를 올려드릴 때 회중들은 음악 감상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멋진 화음이 한 곡 잘 들어서 감격의 박수를 치지만  그 노래를 받으셔야 하는(받으시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마음은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예배 인도자의 문제입니다. 예배 인도자가 그런 식으로 임하면 회중 성도들도 그렇게 되기 마련입니다. 회중들이 습관에 익숙해지지 않도록 자주 각 순서의 의미를 일깨우는 것도 예배 인도자의 역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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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많은 설교자들의 설교를 듣게 됩니다.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감동적>인 설교의 차이가 뭐냐고 묻는다면  저는 두 가지를 말하겠습니다. 진짜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성도들에게 전달하는 것이고,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 심정>을 성도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지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하고 시작은 하는데  성경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설교자 자신의 생각,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설교시간에 하는 정치적인 발언은 설교자의 횡포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본문 전후좌우 문맥은 그런 내용이 아닌데 엉뚱한 해석과 적용도 위험합니다.

 

언젠가 우리 시골교회 성탄절에 외부에서 설교자 한 분이 초청되어 왔는데 아마도 같은 교단에 속한 은퇴 교역 자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성탄절 예배에서 그분의 설교를 들으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아니, 앞으로 나가 그분 설교를 중단시키고픈 충동을 받았습니다. 너무 커다란 분노가 제 심령에 가득했습니다. 성탄절 예배엔 전통적으로 마을 주민들 중 안 믿는 주민들도 상당수 참석합니다. 이른바 <예의상> '말씀 값' 헌금까지 가지고 참석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입니다. 그런데 시종일관 자기 자랑과 과시적인 극히 사적인 이야기들을 설교라고 하시는 그분에 대해 분노가 느껴졌습니다. 예정된 시간을 갑절이나 넘긴 장황한 그 설교(?) 시간이 너무 억울했습니다. 이런 설교를 들을 땐 차라리 그냥 성경 구절을 온 성도들이 한 목소리로 읽고  다 같이 "아멘!" 하고 화답을 하는 게 훨씬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정말 훌륭한 설교 인지도 모릅니다. 예배 중에서 <설교> 순서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말씀하시는 시간>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다 같이 소리 내어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도 하고, 때로 그게 훨씬 의미 있을 수도 있습니다. 회중들이 정말 간절히 사모하는 것은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이 애타게 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듣고자 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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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세련된 문맥은 아니고 기승전결 설교 구성은 서투르지만 그리고 전하는 이의 발음은 어눌하고 언변은 신통치 않지만  들을 때 항상 언제나 감동이 되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설교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심정>을 전하는 설교입니다. 다시 말하면, 회중들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느끼게 하는 설교야 말로 가장 훌륭한 설교인 것 같습니다. 자녀들의 신실치 못한 삶의 태도에 대해 안타까워하시고 애태우시고 눈물 지으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설교를 통해 느끼면 저절로 회개가 나오고, 삶의 새로운 결단을 하게 됩니다. 나를 너무도 사랑하시고 아끼시고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설교를 통해 느끼면 이제 세상 끝내야겠다 싶었던 절망의 마음이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소망의 마음으로 바뀝니다. 제가 회중의 일원으로 회중석에 앉아 있다 보면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심정이 담긴 설교를 들으면 회중들의 심령이 요동치는 것을 느낍니다. 교인 숫자 대여섯 명이 전부인 저 시골교회에서도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심정을 전하는 설교자의 설교는 천둥소리보다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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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순서 하나하나 중 무의미한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그 순서들을 그냥 순서에 맞추어 진행하면 모든 순서가 다 무의미해질 수도 있습니다. 찬송가 한 곡을 정할 때도 깊은 생각과 숙고 후에 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부를 땐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너무 잘 알아서 눈감고도 훤히 다 외우는 찬송가일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예배 인도자가 찬송가 부르기 직전에 그 가사에 대해 한번만 일깨워 주어도  그 노래 한 구절 한 구절이 엄청난 외침의 설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회중들의 자세와 태도, 마음가짐도 정말 중요하지만 예배 인도자, 설교자의 역할도 정말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최용덕 간사 프로필
- 성가 작사 작곡가:

- 대표곡-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일어나 걸어라. 가서 제자 삼으라.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오 신실하신 주. 오늘 나는
- 성가악보집 <찬미예수> 시리즈 편집자
- 문서선교 월간 해와달(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편집 발행인
초청문의 및 연락처
- 해와달/갈릴리마을 행정실 : 010-6373-2071
부탁드리는 말씀
부족한 저를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함께 주님의 의를 이루어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는 대전새로남교회(예장 합동/ 담임교역자- 오정호 목사님)를 출석하고 있고 저의 교회 직분 호칭은 따로 없습니다. 담임목사님의 뜻에 따라 집사 직분도 없습니다. 선교단체 <간사>가 오랜 저의 호칭이 되었습니다. <간사>라는 호칭이 거북하시면 <집사>라고 하셔도 무방하고, <형제>라고 하셔도 됩니다.


1. 저에 대한 사례는 교회나 기관 형편에 맞추어 책정하시면 되고, 절대 무리하지 않도록 해주세요.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형편에 맞게 정하셔도 아무 문제없습니다. 미자립 개척교회는 무사례 집회도 기쁨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갚아주시므로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2. 제가 요즘 나누는 간증 시간은 평균적으로 1시간 10-1시간 20분 정도 소요됩니다. 그러나 형편에 따라 허락되어진 시간 동안 섬기겠습니다. 도중에 함께 찬송을 부르기도 하고, 자료 화면을 같이 보면서 진행합니다.

3. 집회시 저는 아랫 강대상을 이용하겠습니다. 마이크는 무선마이크가 되면 좋고 무선마이크가 아니어도 전혀 상관은 없습니다.

4. 집회시 자료 화면(그림파일)을 함께 보게 되므로 프로젝터 이용이 가능하면 더욱 좋고 컴퓨터로 음악파일이 실행될 때 스피커로 소리가 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교회 설비가 그렇지 못하면 미리 연락주시면 제가 참조하도록 하겠습니다.

5. 저녁 집회시, 저는 저녁식사를 정말 가볍게 먹습니다. 할 수 있다면 제가 개인적으로 저녁식사를 해결하고 교회로 가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만약 형편상 초청하신 측에 식사 신세를 져야할 경우, 김밥 혹은 간소한 한식이 가장 좋습니다. 육류 종류는 사양합니다. / 집회 중엔 거의 물을 마시지 않는데 식사 후 2시간-2시간 반 정도가 경과되면 혈당이 떨어져 저혈당 증세가 오기에 진한 설탕물을 한 컵 정도 강대상에 준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6. 저의 집회 내용을 영상 녹화하여 홈페이지에 올리는 일은 사양합니다. 간증 내용 중에 아직 생존해 계시는 부모님과 관련된 아픈 가족사 때문입니다.

7. 하나님 앞에 두려운 마음으로 이 집회를 섬깁니다.제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도록 중보기도해 주세요.